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화조 사건 (문단 편집) == 사건의 발단 == 1994년 [[김일성]]의 죽음[* 김정일은 이미 19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992년 원수 계급을 받으며 군 통수권까지 완전히 장악하게 됐다. 김일성은 김정일을 거치지 않고서는 어떠한 보고도 받을 수 없게 되어, 정치적으로 꼭두각시 수준으로 전락했고 사실상 '[[상왕|최고 고문]]'의 역할([[황장엽]]의 주장)로 밀려나게 된다. 이때 김일성은 단지 명목상의 국가원수(= [[얼굴마담]])에 불과했고, 실권은 김정일이 휘둘렀기 때문에 김일성의 죽음과 권력 구도 변화와는 큰 관련이 없다.]으로 그 뒤를 잇게 된 [[김정일]]은 '유훈통치'라는 비정상적 체제로 가는 한편,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권력 주위에 아직도 남아있는 김일성의 측근들을 제거하는 것과, 흉흉해지기 시작한 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이미 1974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정에 의해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인된 이후에[* 다만 공식적인 발표는 1980년이었다. 1974년부터 1980년까지는 북한 정권과 언론은 김정일이 후계자라는 사실은 감추고 대신 "당중앙의 영도하에 어쩌구 저쩌구~"하는 식의 표현을 사용했고, 당시 한국에선 '당중앙'이 무엇을 뜻하는지 추측이 분분했다.] 계속 지도자 수업을 받아온 김정일이지만 1991년 인민군 최고사령관 직책을 획득하기 까지 권력 세습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물론 김정일은 1960년대 말부터 조선로동당 문화예술부장 겸 선전선동부장으로 재직하면서 '[[교향곡 피바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264|꽃파는 처녀]]'와 같은 김일성 세대의 항일유격투쟁 업적을 찬양하는 작품들을 영화로 제작하거나, 또는 연극 무대에 올리면서 김일성 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것이 [[김영주(북한)|김영주]]와의 후계자 경쟁에서 승리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으나 군부에 대한 영향력이 없었다는 점이 불안 요소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김일성이야 "항일 유격" 활동이라는 간판이 있었기에 군의 지지를 쉽게 얻을 수 있었지만 본인은 군 경력이 전무하니 군부에게 영향력이 없었던 것. 그런 와중에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이후 이복형제 [[김평일]]의 행보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사건 직후 김평일은 북한의 [[대학생]]들로 하여금 군 입대를 독촉하고, 여기에 자신 역시 직접 자원해 [[인민군]]에 입대함으로서 군의 신뢰를 높이 사는데 성공한다. 사실 김평일은 김정일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는데, 우선 [[김일성]]과 흡사한 외모를 지닌 [[김평일]]에 대한 지지도는 그야말로 [[넘사벽]]이였고, 거기에 김일성은 김평일이 태어났을 때 "우리 집안에 [[장군]]감이 났다"면서 좋아했을 정도의 인물이다. 더구나 [[러시아]] 출생이었던 김정일과는 달리 국내 출신이었던 까닭에 소위 "[[백두혈통]]"에 대해 이의가 없었다. 거기에 김정일이 1980년대 들어 김일성을 "[[수령]]님의 건강과 여생을 위하여"라는 명목으로 김일성을 슬금슬금 권력 밖으로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정책을 수립, 지시하게 되기 시작하면서 그의 지도력에 상당한 결점이 있음이 발견되었다. 말하자면 [[김일성]]은 다른 사람의 사소한 의견이라도 들어줄 줄 아는 아량이 그나마 좀 있었던 반면, 김정일은 자신의 의지대로 관철되고 집행되어야만 되는 독단주의자였다. 일례로 북한과 [[대만]] 군사과학자 상호협력에 관한 안건을 토의하던 협의회 중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총리|정무원총리]]였던 [[강성산]]이 "이러한 중요의제는 일단 수령님께 보고를 드리고 비준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의견을 내자 "안 그래도 몸이 불편하신 수령님께 그런 것을 보고드려 부담을 드릴 필요가 있갔소?"며 묵살해 버렸다고 한다. '''대만과의 교류는 [[중국]]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만큼''' 신중함이 요구되는 중요한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이렇게 독단적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진행한 정책들이 모두 시행착오 내지는 실패로 귀결되자, 권력의 중요 요직을 맡고 있던 김일성의 측근들이 목숨의 위태로움을 감수하고 비밀리에 이러한 과실을 김일성에게 보고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본질을 알고 난 김일성은 크게 노하여 "지금부터 모든 중요 안건은 당 지도부를 거치는 일 없이 내게 직접 보고하라!"라며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여기에 사소한 가정 문제를 갖고 있던 [[강성산]] 정무원총리를 눈엣가시같이 여기던 김정일이 가정혁명화로 크게 부각시켜 해임시켜버리자, 격노한 [[김일성]]이 "당 총비서로서 당 조직비서에게 당적 경고를 준다"고 한 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았던지 "어떻게 자신의 친인척도 가리지 않는가?!"[* 강성산은 [[김일성]]의 어머니인 [[강반석]]의 먼 친척이라는 설이 있다.]라면서 노발대발했다. 게다가 김일성 사후 나타나기 시작한 [[고난의 행군]]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다. 인구 17만의 [[김책시]]에서 하루에 200명의 노동자가 [[아사|굶어 죽는]] 정도였는 데다, 그나마 주민을 연명시키던 동시에 주민 통제의 핵심인 [[배급]]제마저 붕괴되면서 아사자는 수십만에 이르는 상황까지 일어난다. 소위 [[고난의 행군]]이 절정이던 1998년에 가면 [[평양]]을 제외한 전국의 배급이 끊기게 된다. [[송림제철소 학살 사건]]도 이미 '심화조'의 숙청이 한참 진행되던 1998년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당시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제철소 노동자들에 대한 배급이 장기간 끊기고 다들 굶어죽기 직전 상황이 되자, 간부들이 임의로 자재를 내다 팔아서 식량을 마련한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자구책을 마련한 것인데, 북한 정권은 국유재산을 마음대로 빼돌린 범죄 행위이니 법대로 한다면서 간부들에 대한 일제 처형을 지시했고, 여기에 노동자들이 "다 굶어죽을 판이라 어쩔 수 없었다!"면서 반발해서 농성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인민무력부 [[탱크]]부대가 노동자들을 묶어서 산 채로 깔아뭉개 살해하는 것으로 상황은 종결되었다. 이러면서 여러 가지 민심이반의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김정일은 사상 무장을 더 강화함과 동시에 이 난국을 타개할 묘책을 짜내기에 골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묘책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제공받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